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드 케네디 (문단 편집) === 긍정적 평가 === >오늘 우리는 대부를 잃었습니다. 테드 케네디 의원의 꿈은 그의 [[존 F. 케네디|형]][[로버트 F. 케네디|제]]들이 꿈꿔온 것과 같고, 멀게는 [[건국의 아버지들]]이 꿈꿔온 것이기도 합니다. 그는 자유주의의 사자로서 더이상 포효할 수 없게 되었지만, 그의 꿈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. >---- >[[해리 리드]]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, 그의 장례식에서 케네디 가문이 이미지 정치를 한다는 비판은 널리 알려져있고 특히 [[로버트 케네디]]는 실적이 없으면서 대선에 출마한 것으로 매우 박하게 평가받는다. 그러나 테드 케네디는 형제와 달리 50년에 걸친 상원 의정활동을 하면서 쉴세 없이 진보적인 입법 활동을 펼쳤고, 형제들에 비해 성향 역시 더 진보 좌파 쪽에 가까웠다. 특히 의료보험을 현대화하려고 한 테드 케네디의 노력은 후일 [[오바마케어]]라는 이름으로 현실화되기도 하였다. [[조지 맥거번]], 웨인 모스, [[유진 매카시]] 등 민주당에 수많은 진보 좌익 아이콘이 있었지만, 그중 가장 진보적이면서 가장 꾸준히 입법 활동을 벌인 것은 테드 케네디였다. 케네디는 의료보험 문제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인권, 여성 인권, 소수인종 인권 등 미국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고, 이는 [[로널드 레이건]]이 주도한 1980년대의 우경화 바람에 자유주의의 불길을 유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. [[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]] 역시 테드 케네디의 인턴으로 활동했던 경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테드 케네디는 자칫 무너질뻔한 민주당의 진보좌파 전통을 가장 잘 지켜낸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. 동료 정치인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. 47년간 상원의원으로 지내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친구를 많이 만들었다. 특히 [[조 바이든]]과는 평생의 친구 사이였고[* 1988년 바이든이 뇌동맥류로 쓰러졌을 때 바이든은 레이건 대통령의 안부 전화도 가족이 받게 했지만 테드 케네디만큼은 직접 병원으로 병문안을 오게 했다.] [[조지 맥거번]], [[존 매케인]], [[대니얼 이노우에]], [[밥 돌]]과도 절친이었다. 젊은 시절에는 [[로버트 버드]]와 서로 극혐했지만[* 1971년 민주당 원내총무 선거에서 맞붙었고 케네디는 원내 진보파의 리더, 버드는 원내 남부민주당파의 리더로 거의 성향이 반대였다.] 시간이 지나면서 1990년대~2000년대 둘은 민주당의 최고참 상원의원이 되었고 결국 노년이 되어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